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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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을 새롭게 발명하기
─제22회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예술사 졸업전시 <안녕을 위한 베타테스트> 리뷰


오혜진

 

일 년 만인가. 교정에 들어서는 발걸음이 꽤 낯설다. 벌써 두 해가 지나도록, 나는 어릴 적 상상하던 미래도시의 주인공처럼 ‘가상세계’라 불리는 시공간에서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이 만남은 ‘가상’인가? 그곳에서 ‘교육’ 혹은 ‘소통’이라 할 만한 일이 정말 일어나는지 전혀 확신할 수 없지만, 어쨌든 나는 절망과 보람을 골고루 느끼며 고립되고 안전한 내 방에 오래 머무는 중이다. 하지만 ‘전시’라는 사건은 내 방으로부터 12km 떨어진 성북구 한켠으로 기어이 내 신체를 끄집어냈고, 이 물리적 이동 덕분에 나는 한예종 건물이 내뿜는 특유의 냉기를 온몸으로 감각하며 비로소 떠올려볼 수 있었다. 이 건물이 펜데믹의 시간을 겪어내는 아주 구체적인 장면을. 팬데믹 이전과 이후에 이곳을 (못) 드나드는 수많은 몸들을.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관객은 분주해진다. 체온감지 카메라와의 적절한 거리를 조절해 잠시 차렷 자세로 렌즈를 응시하고,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신상정보가 기입된 큐알코드를 제출한 후, 전시 안내자들로부터 동선을 고지 받고, 작품에 대한 음성해설을 접할 수 있는 어플 설치를 권유 받아 빠르게 실행한다. 까다로운 규제인지 살뜰한 돌봄인지 항상 헛갈리는 이 모든 과정은 내 몸이 누군가로부터 감염될 수도, 누군가를 감염시킬 수도 있는 위험한 몸이라는 점, 시청각을 비롯한 특정 신체 및 감각기관이 때때로 불충분하게 작동할 수 있는 불완전한 몸이라는 점을 효과적으로 상기시킨다. 그리고 천명한다. 바로 그 취약하고 불온한 몸이야말로 예술을 경험하기에 최적화된 몸이라고. 그래야 한다고. ‘배리어프리’라는 다소 부정확한 역어로 표현되는 이 정당한 의지는 한예종 졸업전시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라 한다. ‘배리어프리’라는 말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간 ‘미술경험’의 ‘배리어’로 존재하던 것들이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 시도는 그 자체로 기존 미술문법에 대한 ‘낯설게 하기’이기도 할 것이다.

전시는 2회에 걸친 오프라인 전시와 온라인 전시의 병행으로 진행됐다. 여기 발표된 49명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대해 한마디로 말하는 건 가능하지도, 적절하지도 않을 테다. 다만 짐작해본다. 학교와 미술관이 닫혔다 열리기를 반복하고, “조용한 학살”[1]이라 불릴 만큼 여성과 소수자의 고용위기가 극심해졌으며, ‘문화예술’의 이름으로 차별과 폭력과 혐오가 끝없이 증식하던 지난 2년간, 아니 매순간, 미술적 상상력은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 누군가의 침대에 물에 차고 번개가 내리꽂힐 때, 몸속 깊은 우울이 흘러나와 낙서 같은 얼굴이 되고 덩어리가 될 때.

미더운 것은, 이번 전시에서 발표된 작품들 중 어떤 것도 ‘치유, 화해, 대안, 구원, 회복’ 따위를 손쉽게 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미디어에서는 코로나19 사태가 곧 끝날 것처럼 ‘포스트-코로나’ 따위의 구호를 성급하게 발설했지만, 이 전시는 어떤 오염원도 없는 말끔한 유토피아를 상정하지는 않았다. 명징한 서사를 기약하지 않는 푸티지들, ‘과거와 현재, 안과 밖, 자연과 인위’의 식별 가능성을 섣불리 재단하지 않으려는 재현의 시도들은 기승전결의 형상으로 매끄럽게 봉합되는 재난서사의 문법을 단호하게 거절한다.

오히려 이들이 천착하는 것은 ‘완전한 세계’라기보다는 차라리 새롭게 발견되고 발명되는 무수한 ‘오류’와 ‘착오’들이다. 아름답게 간직해온 소중한 기억을 흐릿하고 때 묻은 캔버스에 놓아보는 일, 자꾸만 도시 바깥으로 밀려나는 내 방에 부려진 오래된 사물의 질감과 출처를 헤아려보는 일은 그간 분절된 세계에서 자족적으로 누려온 안위에 대한 조심스러운 탐구다.

그렇다면 과연 이 위태로운 세계에서 누군가의 ‘안녕’을 상상하기에 가장 적합한 형식과 조건은 무엇일까. 이를테면 자본화된 ‘가상’의 시공간에서 자아의 지복至福을 ‘진심’으로 염원하는 일, 진정한 공감과 연민은 오직 당사자와 혈연가족만의 특권이라고 믿는 세계에서 비-시민과 비인간동물을 포괄하는 확장된 친족체계와 돌봄 네트워크를 상상해보는 일은 어떤가. 혹자는 열없고 미련한 짓으로 치부할지 모를 이 모순 가득한 수행들은 모종의 뜨거운 질문들을 품고 있다. ‘아무 탈 없이 편안한 상태’, ‘사회의 모든 질서가 바로잡히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이 안전한 상태’라고 사전적으로 풀이되는 ‘안녕’의 보이지 않는 위계와 질서를.

2017년에 사회적 행위로서의 ‘돌봄’을 사유하고 실천하기 위해 결성된 ‘더 케어 컬렉티브’는 선언한다. “오로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친족만을 돌보도록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는 ‘자기 것 돌보기’의 편집증적 형태를 초래”하는데, 실은 “안전과 안락에 대한 감각이라는 것이 매우 예민해지면, 다른 사람은커녕 자신을 돌보는 것도 힘들어”[2]진다고. 그러니 지금 발붙인 이 도시, 서로 다른 세대와 성별과 언어와 국적을 가진 이질적인 몸들이 멜로디처럼 섞이는 이 도시에서 지금 필요한 것은, ‘안녕’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발명하는 일 아닐까. 그저 자아의 무해와 무탈로 수렴되는 ‘안녕’이 아니라, 그것이 세계를 구획하고 경계 짓던 방식을 집요하게 탐문해보는 일. ‘최종 완성’을 단언하지 않는, ‘안녕을 위한 베타 테스트’.






[1] 임재우, 「‘조용한 학살’, 20대 여성들은 왜 점점 더 많이 목숨을 끊나」, 『한겨레』, 2020. 11. 13.
[2] 더 케어 컬렉티브, 정소영 역, 『돌봄선언─상호의존의 정치학』, 니케북스, 2021, 15~3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