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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듭짓지 않은 매듭으로 관계하기 또는 관계 맺기
한국종합예술학교 조형예술과 21회 졸업 전시 «크라운 샤이니스»

콘노 유키


크라운 샤이니스(crown shyness), 우리말로 수관기피현상을 잘 설명하려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명확한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전달력이 있을지도 모른다. 울창한 숲 속에서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볼 때, 다른 나무에 간섭하지 않도록 자라는 나뭇가지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하늘이 마치 균열을 낸 것처럼 녹색은 갈려 뻗어 있다. 이를 보고 나무가 서로 양보한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시각적으로 교차할 일은 없어도 간섭하는 관계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 2020년을 되돌아본 지금 시점에서 이해하려면, 그 관계는 양보 아닌 ‘거리두기’의 관계로 이해할 수 있다. 닿는 일로 야기되는, 도래하지 않은 가능성에 대한 불안으로 크라운 샤이니스 현상을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이 현상에서 보는 대상을 개별 나무에서 숲 전체로 바꿀 때, 앞서 말한 양보의 상태에 보다 가깝게 와닿는다. 숲 전체의 일조량을 유지한 결과로서, 나무는 개별 존재보다는 숲이라는 더 큰 단위에서 살아 숨쉬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크라운 샤이니스 현상에서 ‘긴장된 관계’는 거리두기와 양보처럼 부정과 긍정으로 끌어당기는 두 가지 힘이 갈라지지 않은 것으로 나타난다-나타나지 않는다. 개별과 집단에서,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하는 호흡은 2020년의 팬데믹 사태를 경험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이에 거리를 부여하는 갈림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도 되고 저도 되는 중립과 달리 긴장 관계는 각각 다른 방향으로 기점 세워지는 특성을 지닌다. 크라운 샤이니스를 제목으로 끌고 온 한국종합예술학교 조형예술과 제21회 졸업 전시에서 학생들이 배경 삼던 환경은 아마도 앞서 언급한, 어쩌면 그것보다 더 많은 ‘긴장된 관계’일지도 모른다. 전시의 서문으로 쓰인 김해영과 임다울의 글에서도 (직설적인 묘사는 많이 생략되었지만) 2020년에 전시를 준비하면서 배경으로 자리잡은 상황들이 암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전시는―원래 졸업 전시는 그 형식부터 특정 주제만 가지고 갈 수 없지만―이런 환경‘에 대해’ 노골적으로 말하거나 주제로 삼지 않는다.

크라운 샤이니스라는 특정 키워드를 통해 들여다보면 이번 전시는 긴장된 관계가 부각된다. 그것은 작품 내부에서 일어나고 또한 작품과 외부―작가 개인의 경험, 사회적 상황 등―사이에서 일어난다. 거리를 유지하면서 자라는 나무에 일어나는 현상은 이번 전시에서 소개된 몇 가지 작품에 긴장된 관계를 함축하였고,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생각을 열어젓는-풀어놓도록 한다.

긴장된 관계란 관계하기와 관계 맺음의 차이를 짚는 점에서 의미의 무게 중심을 ‘긴장’쪽에 부여한다. 관계하는 것/관계하기와 관계 맺기/관계를 맺(도록 하)는 것의 차이 때문에 긴장은 발생한다. 전자가 무의식적이거나 의도를 벗어났는데도 연루되는 것이라면 후자는 관계를 형성하려는 접근 방식을 통해 얻어지는 인과성으로 연결 지어진다. 말하자면 전자에서 관계는 배경으로 후퇴하는 데 반해, 후자에서 관계는 이룩하는 대상이다. 이 두 가지 사이의 긴장을 다룬 작품이 박준희의 <그을 수 없는 선>(2020)이다. 그의 영상 작품은 개인적인 소재를 다루면서 이를 둘러싼 관계하기와 관계 맺기에 대한 생각으로 유도한다. 작가는 작품 속에서 자신이 수전증을 앓고 그것이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거쳐 자신에게 유전되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영상을 통해서 보는 사람은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뿐만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던 섬(용초도)의 생활사를 듣는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관계하고 있고 관계 맺는 일 사이에서 요구되는 판단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바로 영상을 보면서, 섬에서 떠나지 못한 할머니가 겪은, 지금 시대에서 되돌아볼 때 가부장적인 억압과 본인의 증상, 나아가 섬이 수용소로 활용된 역사가 오버랩되면서, 관객은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있는 것 사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핏줄을 둘러싼 주제가 비교적 전통적이라면, 왕은아의 작품 <옹고집딸기전>(2020)에서 관계하기와 맺음은 동시대적 환경을 바탕으로 언급된다. 작업에서 묘사되는 공간은 차지하는 (수)용량을 늘리는 곳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영상에 나오는 도시의 주거 문제뿐만 아니라 데이터를 비축하는 공간과도 상응한다. 데이터를 실용하는 곳과 비축하고 가동시키는 곳, 이 두 곳은 각각 실물로 존재하고 가상으로 존재한다기보다 할당량의 관계이다. 주거수가 전체 인구를 대변하지 않듯이 데이터 또한 마찬가지다. 두 공간은 동시대적 환경에서 부각된 관계지만, 넓게 보면 자연과 인간의 대립에서 비중을 바꿔간 결과로 볼 수 있다. 작가가 작업에 참조한 옹고집전에서 딸기가 주술적으로 복제되어 자연의 생산량과 비축량을 초과하는 것으로 묘사되듯이, 오늘날에 대량의 데이터는 인간의 생산량을 넘은 곳에서 만들어진다. 모든 것이 가상으로 이루어지고 만들어진다는 생각과 달리, 고화질 데이터, 자동 저장되는 섬네일, 일시적으로 입력된 암호값은 생성되는 대상이며 저장되고 처리되는 공간이 필요한 대상이다. 옹고집전에서 딸기로 묘사되는 초과된 자연/자연을 넘은 것처럼 <옹고집딸기전>에서 작품이 보여주는 관계란 데이터로 묘사되는 초과된 인위/인위를 넘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긴장된 관계는 <그을 수 없는 선>에서 이미 연결되어 있거나 연결 지어지는 두 축 사이에서 요동치며 <옹고집딸기전>에서 자연과 인간의 무게 중심이 서로 옮겨지는 양태를 보여준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긴장된 관계에서 정작 떼려고 해봤자 뗄 수 없는 것은 기준을 세워 정확히 분간하는 일뿐만 아니라 기준을 두고 미끄러지는 관계이다. 긴장된 관계는 고정된 관계 축에 고집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가 침투하고 덮어쓰이고 교체되는 양상을 지닌다. coknow의 작품에서 우리는 내적으로 옮겨지는 기준과 이에 따르는 가치의 관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전시 공간에 설치된 영상 <Penguin is legend>(2020)의 자막에서 강조되는 ‘진짜’라는 표현은 수식어 역할도 담당한다. 그런데 오늘날 SNS에서 주로 보는 특유의 말투에서 ‘진짜’나 ‘리얼’이라는 말이 허물처럼 느껴지듯이, 그의 작품에서 강조되는 이런 말들은 유명 인사가 된 미술가가 블록버스터화되어 소개되는 오늘날의 상황을 역설 없이 그대로 표현한다. 영상에서 이 말투는 쿠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제프 쿤스, 그리고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을 언급하는데, ‘뭔지 모르지만 매력 있는’ 작품이 가치가 있어 보이는 기준으로 묶인 오늘날의 수용 환경을 묘사한다. 이들, 특히 제프 쿤스 작품에서 시각적으로 표현된 ‘때깔’은 동시대 환경에서 설명 이상의 힘으로 확산되는 ‘진짜’나 ‘리얼’과 같은 말투로 때깔 있게 묘사된다.

더 나아가 <Penguin is legend>은 이런 포장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작품 배후의 작가를 특권 세우는 지점까지 부각한다. 영상에서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을 화자가 ‘느낌 있게’ 말하는 장면은, 작품을 보는 데 따라오는 ‘사실은 나도 할 줄 아는데?”나 “이게 뭔 미술이라고?”와 같은 질문을 받을 때, 예술가의 자전적인 고백을 통해서 작품에 가치를 매기는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가치를 인정받는 오늘날의 대범주화된 미술 수용 방식을 보여준다. 이 영상에서 마지막에 허스트와 쿤스가 복싱을 하는데, 이 장면에서 둘의 신체 조건이 수치적으로 소개된다. 결국 전자가 이기는데, 그렇다면 신체 조건의 숫자는 가격과 얼마나 상응하고 관련이 있을까? 아무 관련 없어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예 관련을 배제하기도 어렵다. 건강한 신체가 화보에 실리거나 유명 인사와 자리를 함께 하는 일이 그들의 예술 활동을 지지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김지원의 페인팅 <찍> 시리즈(2020)에서 재현된 숫자는 게임에 등장하는 적과 주인공의 능력치를 시각화한다. 공격력과 방어력을 갖춘 적과 주인공의 능력치는 게임 속 전투 장면에서 숫자와 색깔을 통해서 시각화한다. 김지원은 이를 페인팅으로 옮기는데 전투 장면에서 주인공 캐릭터가 공격하고 공격 받을 때마다 다시 나타나는 숫자는 작품에서도 휘발적인 것으로 그려진다. 포착된 숫자는 그의 작품에서 휘발적인 것으로 묘사되는데, 붕 뜨는 성격은 coknow의 작품에서 이동하여 주어지는 것으로, 곧 특정한 가치보다는 가치의 무게 중심이 이동하는 궤도를 그려나간다.

<Penguin is legend>에서 과장된 표현은 진짜라는 수식어와 단어의 뜻 자체가 과포화되고 대상의 실제를 초월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작품에서 언급되는 작가는 생존 작가이며 가상의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수용태도가 그렇듯이 이들은 소위 힙하거나 느낌 있는 식으로 설명되고 신격화의 대상이 된다. 그들의 개인적인 성향이나 의도는 스스로의 실제를 각각 뒷받침한다기보다 상징적인 힘으로 수렴되어 실제를 초과한다. 김지원의 페인팅 <찍> 시리즈에서 숫자와 색깔로 표시되는 힘은 허스트의 키나 쿤스의 작업 어시스턴트 수처럼 그들의 힘=권력을 수치화하여 보여준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실제를 초월한 대상은 표층적이라는 점에서 대상 그대로 (즉 진짜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는 무대 연출과도 비슷한데, 배우는 그곳에서 특정 개인이 아니라 표현 수단의 목적으로 포장된다. 이우경의 작품에서 강조된 것은 무대 공연의 밑그림, 바로 리허설의 측면이다. <신혼기>(2019) <전화기>(2020) <소화기>(2018) <갑작스러운 키스나 뜨거운 시선으로 사랑의 프로그램을 망치진 말아줘 만남과 이별을 적당히 반복해서 시간이 온다면 끝이나, Don’t hurry! … (이후 생략)>(2020)을 보면 서사는 배경에 물러선 채―그중 2020년에 촬영된 작품은 같은 전시에서 소개된 차연서의 <JUICY MOSQUITO>(2020)의 등장하는 장면에서 추출된 연기임을 알 수 있다―그려지지 않는 것으로 작품에 나타난다. 등장인물의 움직임이 강조되면서 명확한 서사는 후퇴할 때, 주인공의 연기와 배경음악, 그리고 등장인물이 움직이는 무대적 공간의 동선이 부각되어, 그곳이 어떤 연출의 자리로 기능하다는 지점을 보여준다.

그곳은 사실상 한정되어 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 컷을 쪼개고 연결하는 것과 다른 방법으로 공간이 만들어진다. 걸어다니는 위치는 무대에서 벗어날 일 없지만, 나아가 거의 같은 위치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연출은 그곳을 다른 곳으로, 일인다역을 각각 다른 인물의 관계로 묶어준다. 같은 대상이 다르게 역할하는 무대연출의 성격은 이휘웅의 작품 속 기호의 측면에서 연관시킬 수 있다. 영상 작품 <삐쭈에게>(2020)에서는 사라진 존재를 지시하는 바 즉 의미가 미끄러지는 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제목에 나오는 사라진 개 ‘삐쭈’는 영상 처음에 사진 이미지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 장면으로부터 알 수 있듯이 작품에서 인물을 비롯한 대상은 내부적으로 변화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예컨대 상호교차하거나  대입되는 목소리, 기어다니는 까만 존재, 그리고 가면을 쓴 인질과도 같은 인물은 내부와 외부의 괴리에 기반하여 내부적으로 다른 존재로 등장한다. 실제 대상이 다른 대상으로 대입되는 역할 놀이와도 같은 현상은 그의 작품에서 사운드-인물 간의 이접과 인질처럼 개성을 시각적으로 붕쇄당한 가면으로 등장한다. 이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바로 분신사바를 하는 장면이다. 사물을 매개하여 다른 존재를 소환하는 행위는 분신사바의 제의적인 성격을 강조하는데, 이는 사라진 삐쭈를 소환하는 데  실제 사물에 다른 존재를 또는 그 반대로 다른 것에 실제를 부여하는 관계를 보여준다. 검은 존재는 삐쭈라고 하면 삐쭈라 믿을 수 있지만, 영상 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모으고 다니는 산발하는 살인자의 일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볼 수 있다.

<삐쭈에게>에서 이미지는 실제 대상과 대입되는 대상 사이에 놓인 복수적인 긴장 관계로 나타난다. 이처럼 이미지는 하나의 대상을 다른 대상으로 믿도록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하나의 대상을 여러 대상으로 변주시키는 중간 지대로 놓여 있다. 전환되는 관계는 이토명의 <Today is the giant's birthday and the bee's dayoff.>(2020)에서, 특히 퍼포머가 움직이고 카메라가 종종 따라가려는 이동식 커튼에 집약된다. 각자의 공연을 준비하는 4명의 퍼포머와 한 명의 촬영자가 한 장소에 모여 각자의 동선을 카메라 앞에서 연습하면서 출발하는 이 작품에서, 연습의 위상은 미래를 대비하는 현실 사회와도 공명한다. 바로 2020년을 겪은 배경을 어느 순간에 부각하면서도 이를 작품 내로 걷어찬다. 머리카락이나 안면을 가려 비교적 깔끔한 인상을 주는 퍼포머의 복장, 대사 없이 강조되는 동작은 본 공연을 향하는 기록에 머물지 않는다. 공연을 예상하여 퍼포먼스 (연습) 를 펼치는 데 그치지 않고, 예정된 결과를 향해 분주할 때, 카메라 너머 전개되는 장면은 2020년에 처한 상황을 보는 사람에게 전율시킨다. 특히 중간 중간에 이동식 커튼을 들고 지나가는 퍼포머는 분주하는 의료 환경을 암시하면서도 동시에, 막을 내리고 또 올리는 퍼포먼스의 시작과 끝을 잇는 커튼(幕)의 역할을 한다. 따라서 커튼은 연출된 상황을 지시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상황을 전환하는 역할 또한 수반한다. 시야를 일시적으로 가리고 또 다른 퍼포머의 움직임과 자세로 이어줄 때, 퍼포머가 들고 움직이는 커튼은 걷어차는 방식에서 거두어 (다시) 채우는 역할을 동시에 실현한다.

이제 전시 기간이 끝나면 시공간은 장면 전환을 거치게 된다. 큰 전시는 전염이나 재난을 소재로 다루게 될 것이고 작은 전시에서 방명록보다 개인정보 취합용 명단이 익숙한 풍경으로 비쳐질지도 모른다. 최근 몇 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조형예술과 졸업 전시를 본 입장에서 (미래를 예견하여 기약하겠다는 의미 없이) 졸업 전시를 마무리하고 다른 시공간에서 졸업생의 다른 결과물을 보는 기회가 있었다. 상상을 금방 할 수 있을지라도, 졸업 전시 이후에 작품을 보여주고 또 보는 일에 시차는 생길 수밖에 없다―그것은 팬데믹 시대에 국한되는 일이 아니라 언제나 그랬다. 이때 시차란 연기나 지체가 오늘날 특히 부정적 뉘앙스를 띠게 된 것과 달리, 긴장된 관계라는 궤도에 자리한다.

아마도 많은 학생에게 졸업은 학교 생활의 시작과 폐막을 잇는 매듭에 불과하다. 긴장된 관계는 사회적 상황은 물론 졸업과 같은 형식적인 행사에도 내포되어 있다. 학생 신분에서 사회 생활의 시작을, 작가 활동의 시작을 잇는 매듭 말이다. 아울러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전시 제목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열린 온라인 전시가 그렇듯이, 수업 공간과 작업실과의 거리두기가 배경으로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번 졸업 전시는 이를 직접적인 소재로 다루지 않고 각기 다른 방식을 통해 작업과 공명시킨 점이 흥미로웠다. 명확한 시대상으로 특정 지어지는 길을 작업에 선취하는 것보다 쉬운 일도 없다. 긴장된 관계에서 끌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은 기회만 생기면 사전에 노릴 수 있는 특정성―졸업을 ‘기념’하거나 팬데믹 시대를 내세워 틀짓는 특정성이 아니라, 작가와 관객의 생각, 사회상과 개인의 공명의 대지(臺紙-大地)를 펼쳐 놓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이들의 작품을 보고 매듭을 짓는, 아니 (마무리한다는 의미의) 매듭짓지 않고 나아가도록 하는 시차에 조금이나마 기대를 걸 수 있다―긴장을 아예 없던 것으로 돌려놓는 일이 불가능하다면.